지춘란은 제3유격지대 사령관인 박종근 부대에 배속되어 간호 요원으로 활동하다, . 뒤에 일월산에서 제3지대장 남도부를 따라 남하한다.당시 남도부는 일월산으로 북상 중이었다. 일월산 북상 이유는 지도권 분쟁 해결을 위한 상급 당 기관의 확인을 위해서였다. 당시 일월산은 대남 정보 및 대북 연락의 접선지였다.남도부는 전쟁 전 새로 재편된 인민유격대 제7군단의 사령관에 임명된 후, 예하 빨치산 300여 명을 이끌고 군함을 타고 침투한다. 이때 남도부의 관할구역은 ‘동해 남부 전구’로 경남의 울산, 언양, 양산, 동래, 밀양과 경북의 경주
제2의 쿠바와 체 게바라가 탄생할 것인가!중남미 마지막 미국의 식민지 카리브해의 아이티 공화국(Republic of Hait, 아이티)이 요동치고 있다. 빈민가 출신 지미 셰리지에(Jimmy Chérizier)가 부르주아 혁명을 내세우며, “무장 투쟁”을 이끌고 있다.미국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지미 셰리지에가 심각한 인권 유린 행동을 저질렀다고, 경제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셰리지에는 그들을 오만한 제국주의로 보고 “과거 방식으로 아이티인을 학대하는 유엔군을 용납치 않겠다”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
1951년 봄, 전세는 다시 역전된다. 미군과 국방군이 3월 15일 서울을 다시 탈환한다. 3월 16일 이후 중국지원군 제1제대의 각 군은 38선 이북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대신 제2제대의 각 군은 미리 설치한 진지에서 유엔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다.3월 23일, 미군과 국방군은 고양, 의정부, 가평, 춘천 선을 점령하며, 38선 이남을 대부분 되찾은 다음 38선 이북을 공격한다. 4월 10일 유엔군은 이른바 ‘캔자스선’이라 불리는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서쪽의 임진강에서부터 동쪽의 양양을 잇는 선이었다. 이후 4월 12일 공격
‘서울파’ 사회주의 운동의 영수 이영(李英 1889.4.1-1960.8.13) 1.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단체들의 조직과 조선공산당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10월 혁명은 국내외 민족해방 세력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19년 1월에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기만적인 ‘민족자결주의’역시 식민지 나라들과 민족주의 세력들에게는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일본제국주의의 조선 강점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원동지방으로 망명한 일부 사람들이 이동휘를 중심으로 1918년에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한인사
지춘란은 빨치산에 배속되기 전, 미군 전투기의 무차별 폭격에 대해 부군 황금수에게 “우리는 조국해방전쟁(6·25전쟁) 때 전상자들을 소달구지로 태우고, 미군의 공습을 피해 밤에 월경하여 임시 야전 병원에 놓아두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낮에는 산속에서 쉬었다.”라고 미군 폭격 때문에 간호 요원의 활동 어려움을 이야기했다.또한, 황금수는 빨치산 시절에 대해서 지춘란은 “미군 비행기가 돌아다니면서 휘발유를 뿌리고, 폭탄을 비처럼 떨어뜨려 불에 타죽게 하려고 했다. 우리는 기름 냄새로 감지해서 피해 다녔다, 그러다 보니 다섯 명 정
어머니는 반미자주통일 전사였다. 그러나 동지에게는 항상 밝은 미소의 자상한 목소리로 반겨주시던 다정한 어머니였다.필자는 명절 때와 요양원에 계시는 4·9인혁열사 도예종 선생의 사모님 신동숙 어머니에 대한 근황을 알기 위해 주기적으로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김병길 장기수 선생과 함께 신동숙 여사 면회 갔다 온 이야기랑, 신 여사의 건강을 걱정하며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정말 이런 것이 동지애이구나 하며 어머니를 존경했었다.그런데 이번 설에 새해 인사를 하기 위해 전화를 하니, 연
지춘란은 1951년 2월 15일경 횡성에서 제3유격지대 사령관인 박종근 부대에 배속되어, 뒤에 일월산에서 제3지대 사령관 남도부를 따라 남하할 때까지 의료 요원으로 박종근과 함께 활동한다. 박종근은 이미 1951년 1월 20일, 김일성 총사령관의 명령서를 접수하고 곧바로 제3유격지대를 편성하고 있었다.물론 박종근은 경북도당 위원장 역할도 겸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연합사령부(조·중연합사)의 작전에 따라 제2전선 구축과 유격대 활동이 우선이었다.박종근은 속히 적군의 등 뒤로 움직여 후방 교란 작전을 해야 했
전쟁을 『철학대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동녘, 1989)에서는 전쟁과 전쟁, 전쟁과 전쟁으로 구분한다. 전쟁을 절대적으로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교조주의적 견해와는 반대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쟁과 전쟁, 전쟁과 전쟁을 구분한다. 한 나라의 지배 계급이 자기 나라 인민과 다른 나라 인민을 무장 투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치에 이용되는 전쟁과, 착취 계급의 지배 영역을 폭력적으로 확장시키고 반동 세력의 역량을 폭력적으로 유지하
9월 15일. 유엔군이 감행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조선인민군은 포위되고 만다. 이승만은 평양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호언(豪言)한다. 그러나 38선은 미국과 소련 진영을 가르는 엄연한 분계선이었다. 만일 미국이 38선을 넘는다는 것은, 단순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에 대한 도전만이 아닌 소련과 중국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자 중대한 도발이었다.저우언라이는 9월 30일 인민일보에 “미국은 조선의 정세를 구실로 해공군을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대만성을 침략하였으며, 소위 대만의 지위 문제는 미국이 조정하는 유엔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
지춘란은 6·25전쟁에 참전하여 빨치산에 배속(配屬)된다.부군 황금수는 “여자는 보통 호(號)를 사용하지 않지만, 동지이자 아내인 지춘란에게 월산(越山)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젊은 나이에 산을 넘나들면서 살았다는 것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리고 부부로 살면서 이름 부르는 것보다는, 운동하면서 가명을 사용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호를 부르는 것이 편했다. 지춘란도 좋아했다”라고 겸연쩍어하시면서 말씀하셨다.지춘란의 판결문에는 “4284.2.15경 강원도 횡성에서 대남유격대인 제3지대 간호장으로 편입되여”라고 되어있다.이때는 중국의 항미원
몽양 려운형 선생과 북으로 간 가족들목차1. 몽양과 평양 방문2. 몽양과 김일성위원장과의 인연 3. 몽양가족의 입북 경위와 북에서의 활동1. 몽양과 평양 방문몽양 려운형(1886. 4. 22-1947. 7. 19.) 선생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묘골에서 태어났다. 몽양은 한 평생을 도탄에 빠진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기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천을 하며 동분서주하였다.그는 일찌기 청년시절에 국채보상운동(1907-8)에 참여하였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이후인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한 뒤 상해에서 신한청년당(1918)을
전쟁 이전의 전쟁, 반동과 혁명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프랑스를 필두로 한 선진 제국과 후발 제국인 독일·일본과의 식민지 쟁탈과 재편과정에서 제국주의 간의 모순에 의한 필연의 역사였다. 또한, 전 지구적 수준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파시즘과 반파시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전쟁과 투쟁이기도 했다.거시적으로는 세계의 반제·반파쇼 투쟁과 인민해방운동이었다. 그리고 반자본주의·공산주의 혁명이었다.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해 고통을 겪어 왔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은 공산주의 혁명 등을 통
오늘은 4월혁명 공간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 선생의 62주기이다.5·16 군사쿠데타 후 박정희는 미국의 주구(走狗)임을 증명하기 위해 ‘조국 통일’보다 ‘반공 국시’를 천명한다.그리고 박정희는 4월혁명 공간의 혁신계 인사를 용공 세력으로 몰아 5월 16일부터 21일까지 6일 동안에 무려 2,014명을 체포한다. 두 달 동안 예비검속된 용공 혐의자는 모두 3,098명이나 된다.특히 최백근 사회당 조직부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과 연계되었다고,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관련되었다며 국가가 살인한다.이후 뜻있는
중국 동북3성 조선인 장병들의 귀국중국의 인민해방전쟁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으로, 중국 동북3성 제4야전군 총사령관 린뱌오(林彪, 1907~1971) 산하 조선인 장병은 자연스럽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으로 귀국한다.그것은 중국 동북조선인의 역사적 특성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에서 추론할 수 있다.이와 입술 같은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관계 속에서 동북의 조선인은 항상 역사적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었다.항일전쟁 시기가 그렇고, 중국 인민해방전쟁 시기가 그러했다.▶ 중국 제4야전군 소속 지춘란의 귀국지춘란은 중국 인민해방
중국인민해방전쟁과 마오의 ‘인민민주통일전선’마침내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해방전쟁, 국공내전에서 승리했다.내전이 시작되었을 무렵 양측의 전력은 거의 국민당이 4배 정도 우위였다. 또한, 미국의 국민당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무기와 장비 그리고 보급 면에서 절대적으로 공산당은 열세였다.1946년 6월 26일, 장개석은 16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 통치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전 초기 전세는 국민당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승리는 내전 시작 후 1년 정도가 전부였다.국민당군은 일본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점(
한평생을 쉬지 않고 민족해방과 민중해방 운동에 헌신한 권오헌 선생-‘권오헌의 가려졌던 통일여정’ 출판기념회를 축하하며-사월혁명회 주된 대외 활동 중 하나가 매년 4월 19일 수유리 4·19묘소에서 개최되는 ‘민족민주운동단체합동참배식’과 보통 전날 진행되는 ‘사월혁명상’ 시상이다.권오헌 선생은 2000년 제11회 을 수상하였다.은 사월혁명회가 1990년 4월혁명 30주년을 기하여 제정한 상으로서 매년 4월혁명상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4월혁명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에 기여한 개인 또는 단체
◈사람을 찾아서지춘란, 의료 요원으로 적군과 아군 차별 없이 간호하다.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으로 팔레스타인 10,328명이 사망했고, 무너진 건물 아래 실종된 사람이 2,00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중 어린이와 여성이 6,956명으로 67%이다. (연합뉴스 그래픽, 11.8.) 그리고 지난달 17일(현지시각) 가자지구 알 아흘리 아랍병원에 폭격해 471명의 사람이 숨졌다. 병원에는 환자들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폭격을 피해 민간인들이 모여 있어서 그 피해가 더욱 컸다. 또한, 지난 10일에는 북부 지역 피난민 수천
순서▶ 1910년대 조선의 독립운동기지 만주 ▶ 1931년 만주사변과 조선의 항일유격대 창설 ▶ 동북항일연군과 조선 해방투쟁 기지 만주 ▶ 지춘란, 조선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 용정 출신으로 항일 반국민당 주의자였다.지춘란은 중국인민해방전쟁, 국공내전에서 위생원으로 참전한다.사실 국공내전 시기 동북지방 조선인의 참전은 일제 식민지 시대 중국공산당과의 공동항일(共同抗日) 투쟁의 연장선으로, 중국 혁명역사이자 조선 혁명역사이다.동북지방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의 세 성으로 이루어진 지역으로 흔히 만주(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여성 빨치산 지춘란은 부군 황금수에게 제3지대 사령관 남도부의 유언인 “남도부 3지대가 어떻게 싸웠다는 것을 증언해 달라”라고 자주 말했다.무엇보다 지춘란은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과 신념에 의해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을 위해 2개의 전선에서 미 제국과 싸웠다.하나의 전선은 중국의 중국인민해방전쟁 국공내전이고, 또 하나의 전선은 한반도 조국해방전쟁이었다.2개의 전쟁은 미 제국의 개입으로 계급·민족적 예속을 반대하고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었다.▶ 반소, 반공 기지 건설을 위해 미 제국의 중국 개입1945년
10월 7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통일열사 이재문 42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추모제’가 개최되었다.1976년 2월 29일 박정희 군사파쇼정권에 맞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을 발기한 김병권, 이재문, 신향식 선생의 묘소가 그동안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것을 2019년 3월 30일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장했다.그리고 중앙위원 중 한 분인 이해경 선생의 묘소도 이장되면서, 이제 남은 분은 안재구 선생뿐이다.이 모든 이장에는 지난 9월 17일 숙환으로 운명한 안경자(93세) 여사의 동지애와 통 큰 후원이 컸다.또한, 생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