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현대사] 정주의와 교조주의 혼란 속에서 조선혁명의 주체를 세우다

- 중소갈등과 자주노선 천명

195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은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발단은 1953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Ста́лин)이 사망해 후임 서기장에 취임한 니키타 흐루쇼프(Никита Хрущёв)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에서 반스탈린 노선을 천명하고 벌인 스탈린 격하운동이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1인 지도체제를 개인숭배(북에선 개인 미신이라고 함)’로 비난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의 이른바 대숙청(Большая чистка)’ 당시에 스탈린이 수많은 인사들을 무고하게 희생시켰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스탈린의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반성한다는 명목 아래 수정주의를 전면화했다. 흐루쇼프가 내세운 수정주의 노선은 노동계급을 이끄는 수령의 권위를 개인숭배라 비난하는 대신 인민대중이 참여하는 집체적 지도체제를 주장했다. 경제분야에선 생산수단에 대한 당의 중앙집권을 폐지하고 지역별 건설관리기관인 인민경제 소비에트를 조직해 분권화했다. 더불어 인민에게 자유로운 문화생활을 보장한다는 명분 아래 인민에 대한 사상교양을 사실상 포기하였다. 이밖에 흐루쇼프는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국가들과 관계에서 대결을 지양하고 이른바 평화적 공존’(데탕트, Détente)을 주장했다.

이런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과 서방권에 대한 대화 시도 등 수정주의노선은 사회주의권에 큰 파장을 불렀다. 사회주의권의 또 한 축이었던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과 서방과 대화 시도를 수정주의, 우경투항주의라 비난하며 스탈린주의의 고수를 천명하였다. 이에 소련에서는 마오쩌둥에 대해 교조주의라 비난하며 중-소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른바 중소갈등의 시작이었다. 중소갈등으로 양국 간 경제 합작, 군사교류 등은 일체 중단되었고, 국경분쟁(1969)이 무력충돌로 번지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흐루쇼프의 반스탈린 노선과 여기서 비롯된 중소갈등은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에도 큰 영향을 미쳐 1956년 헝가리 시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시위(이른바 프라하의 봄’) 등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에서 반공시위가 벌어졌으며, 사회주의국가들은 소련식 사회주의노선이나 중국의 사회주의노선(마오쩌둥주의)을 선택하며 양분되었다.

이런 중소갈등과 사회주의권의 혼란 속에서 북은 어떤 길을 택하였을까. 북은 기본적으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승리와 국제혁명운동의 발전을 위해 사회주의국가들과의 친선단결 강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또 맑스-레닌주의 원칙의 창조적 적용을 강조하면서 수정주의나 교조주의 어느 쪽에 편향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우리에게는 그 어떠한 편이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진영의 단결을 수호하는 것이 중요하며, 우리의 공동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중요하며, 평화와 민족적 독립과 사회적 진보를 위하여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인민들의 리익이 중요한 것이다.만일 사회주의진영 내에서 어제는 한 당과 한 나라를 고립시키고 배제하며, 오늘은 또 다른 당과 다른 나라를 고립시키고 배제하는 식으로 나간다면 우리의 통일은 어떻게 되며 우리의 단결에 대하여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북은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의 중소갈등 상황에서 어느 쪽도 비판하지 않고 사회주의권의 단결과 통일을 강조하였으나 점차 사회주의권의 통일단결을 넘어 자주노선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갔다.

19623월 당중앙위원회 제43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은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노선을 비판하면서 세계사회주의운동에서 반수정주의 투쟁을 강화할 것을 호소하였다. 196310월 당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논설 사회주의진영을 옹호하자에서 소련의 수정주의노선과 분열주의 행태를 강력히 비판하였으며, 사회주의권의 단결과 통일을 적극 주장하였다.1964년 평양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경제토론회에선 북 주도로 자력갱생에 의한 민족경제 건설에 대하여란 선언을 채택해 소련 수정주의 비판을 더 강화했다.

당시 소련 수정주의에 대한 북의 비판은 이렇다. 먼저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노선에 대해선 흐루쇼프의 정치적 야심과 대중영합주의로 인하여 현대 수정주의의 발단이 형성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국 공산당에 수정주의를 전파한 결과, 소련의 몰락이 시작되었고 국제공산주의운동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또 이른바 개인숭배(개인미신)’ 반대구호에 대해선 인민대중의 자주적 요구와 이해관계를 분석 종합하고 통일시키며 이를 실현할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수령의 지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흐루쇼프가 핵전쟁 방지를 명목으로 내건 평화적 공존노선의 경우 북은 국제공산주의운동노선을 포기하고 서방 제국주의국가들에 대한 일방적인 정치군사적 투항에 지나지 않는다며 평화적 공존노선은 쿠바 미사일 위기(카리브해 위기)로 파탄 났다고 주장한다.

이밖에 생산수단의 분권화(집단적 지도체제)나 처녀지 개간 등으로 대표되는 수정주의 농업정책은 과학적 기초와 물질적 조건(비료, 기후, 토양, 종자 등)이 보장되지 않은 결과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인민들의 문화사상교양을 포기하여 소련사회 내에 염세주의쾌락주의 등 각종 반혁명적 문화조류를 야기하였다고 비판한다.

북이 흐루쇼프 수정주의노선에서 특히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목은 사회주의국가와 전세계 공산당노동당 등에 수정주의 조류가 확산되면서 사회주의국가들의 통일과 단결을 해치고 각국 공산주의운동에 치명적인 손실을 야기한 것이다.

종합하면, 북은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노선을 자기 수양이 전무하고 권력에 대한 야욕에 눈멀어 이른바 개인숭배와 같은 모략의 무기로 사회주의 기초와 신념을 허물고 모든 것을 적대세력과의 평화적 공존의 희생물로 전락시켜 혁명을 말아먹는 사회주의의 추악한 원수가 되었다고 혹평한다.

이후 1964년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10차 전원회의 결과, 흐루쇼프가 실각하여 수정주의노선은 몰락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Леони́д Бре́жнев)가 집권해 이전의 맑스-레닌주의노선으로 일부 회귀하면서 사회주의권의 수정주의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중국에선 대약진운동(1958~1962)과 문화대혁명(1966~1976)을 거치며 마오쩌둥주의가 더 좌경·급진화 되었는데, 이 역시 사회주의 국가들과 제3세계 독립투쟁에 악영향을 미쳐 사회주의권의 단결을 저해하고 중소갈등을 더 심화시켰다. 북은 <로동신문>에 논설 자주성을 옹호하자’(1966812일자)를 실어 중국 마오쩌둥주의의 좌경화와 사회주의권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대해서도 좌경기회주의, 대국주의, 교조주의라 비판하였고 사회주의권 및 제3세계 국가의 반미·반제국주의 공동전선 구축을 호소하였다.

맑스-레닌주의는 교조가 아니라 행동의 지침이다. 그것은 실천 속에서 검증되며 보충되며 풍부화되여 나간다.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옳게 령도하자면 맑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원리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맑스-레닌주의는 혁명발전에서 제기되는 일반적이며 기초적인 명제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우리는 자기의 로선과 정책을 작성하고 실천하는 데서 나라의 민족적 및 력사적 특성을 결코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매개 나라는 각이한 조건과 환경에 처하여 있으며, 따라서 혁명과 건설의 수행방도도 똑같을 수 없다.

이와 함께 우리는 다른 편향도 경계하여야 한다.시기와 조건을 가리지 않고 맑스-레닌주의의 원리를 기계적으로 옮겨 놓는다면 그것은 교조주의적 편향을 낳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맑스-레닌주의는 생기를 잃게 되며 죽은 교리로 되고 말 것이다. 또한 당은 대중과 현실로부터 리탈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혁명과 건설에 큰 손실을 가져온다.

대국주의는 원래 낡은 착취사회의 유물이다. 그것은 작은 나라를 멸시하고 압박하던 낡은 사회 통치배들의 사상이다. 대국주의가 허용된다면 형제당들 호상 간에 동지적이며 평등한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특히 큰 당이나 사회주의나라 당이 자기의 지위를 리용하여 작은 당이나 자본주의나라 당에 자기 정책을 내려 먹이거나 또한 압력을 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마오쩌둥주의를 직접 거론하며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북은 60년대 중반 당시 문화대혁명 등으로 나타난 마오쩌둥주의의 급진성, 교조주의화, 타국에 대한 영향력 강화(대국주의) 경향을 비판하였다. ‘자주성을 옹호하자논설에서 북은 수정주의를 비판하고 맑스-레닌주의 원칙 수호를 강조하는 한편 자국의 구체적 현실에 맞춰 창조적으로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더불어 맑스-레닌주의 원리를 기계적으로 따르면 교조주의 편향을 낳게 되고, 결국 운동의 생기를 잃고 대중과 현실로부터 이탈한다고 비판하였다. 또 사회주의운동에서 민족적 전통과 문화유산을 계승발전시킬 것을 강조하였으며 특정 국가가 대국주의를 내세워 세계혁명의 중심또는 지도적 당역할을 독점하는 것을 경계하고 사회주의국가들의 상호이해와 존중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 제국주의국가들에 맞선 반제공동투쟁을 사회주의국가들 사이에서 적극 추진할 것을 강조하였다.

논설 자주성을 옹호하자의 기본 내용은, 당시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교조적으로 적용하여 좌경화급진화 일변도를 걷던 중국 마오쩌둥주의와 그 결과물인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이었다. 특히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의 전통 문화유산을 과거의 봉건적 유산으로 모두 부정하고 파괴하던 점을 신랄히 비판하였다. 더불어 중국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과 제3세계 반제투쟁에서 이른바 혁명 수출을 통해 마오쩌둥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전파하려 했으면서도 1960~1970년대 베트남의 반제투쟁(2차 인도차이나전쟁 또는 베트남 전쟁, 1955~1975)에 연대하거나 지원하지 않았던 사실 또한 비판하였다.

1960년대 자주노선의 천명은 이후 북의 사회주의 건설 방향과 외교노선 등의 기본원칙으로 작용하였다. 사회주의 건설에선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국방-경제건설 병진을 통한 자위국방의 실현,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및 노동계급화 등이 강조되었고 외교노선에서는 제3세계 반제·반미투쟁의 적극 옹호와 연대가 강조되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존 사회주의국가들과의 동맹적 외교관계를 넘어 다음에 서술할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제3세계 국가들과 국제연대를 활성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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