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의 원칙은 계승되어 최근의 경제-핵무력건설 병진노선으로 출현하였다고 보겠다.

출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권.

6. ‘한 손에는 총을, 다른 한 손에는 마치를

-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

1960년대 제17개년 계획 수행서 경제건설과 더불어 중요과업으로 선정된 게 국방력 강화이다. 19621210일 열린 당중앙위원회 4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수상은 당시 내외 정세 변화를 반영해 경제와 국방건설의 병진방침을 제시하였다. ‘한 손에는 총을, 다른 한 손에는 마치(망치)!’이란 구호는 그 신호탄이었다.

북이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을 채택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는 19537월 이래 지속되는 정전체제이다. 협정을 체결해 전쟁은 표면상 가라앉았지만 북미(그리고 남북)간 군사대치는 지속되고 있다. 정전체제와 군사대결의 지속은 필연적으로 자위적 국방력 강화(이른바 분단 비용’)로 귀결된다.

그리고 1960년대의 국제정치적 환경이다. 1960년대 초 쿠바 미사일 위기(196210)를 기점으로 냉전 대립은 격화일로로 치달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이른바 평화적 공존을 내세운 흐루쇼프가 쿠바에 배치한 소련 미사일을 철수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계속되었다. 19648월에는 베트남민주공화국 통킹만 일대에서 피격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을 침략하였다.(2차 인도차이나전쟁, 또는 베트남전쟁)

또 동북아에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고자 이른바 한일 삼각 안보체제를 형성하여 영향력을 확대해갔으며 한반도에선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원하며 주한미군 주둔 병력을 늘리고 전술핵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 중소갈등 격화로 사회주의권 분열이 심화되어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과 군사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안팎의 상황을 반영해 북은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을 내세워 경제발전과 더불어 국방력 강화를 동시에 추진한 것이다. 병진노선의 국방력 강화 역시 자주노선의 국방에서의 자위원칙에 따라 시행되었다.

이런 북의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에 대해 남측 학계에선 경제개발 와중에 국방력 강화로 인해 국방비 부담이 늘어 결과적으로 경제발전에 일정 부분 차질을 빚은 점을 강조한다. 실제 당초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예정된 7개년 계획은 3년 뒤인 1970년에 목표를 달성해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의 입장에서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은 불가피했다고 하겠다. 북이 천명한 자주노선에서 이미 경제에서의 자립과 국방에서의 자위를 명시하고 있다. 또 김일성 수상은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 제시에 앞서 경제건설과 국방력 강화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고 자립경제와 자위국방은 연계되어 있다고 꾸준히 강조하였다.

만일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을 보려고 하지 않고 경제건설에만 치우치면서 국방력을 강화하지 않는다면 전쟁의 위험을 증대시키게 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은 고사하고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혁명의 전취물도 지켜낼 수 없으며 조국과 인민을 보위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필요한 경제건설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없고 인민생활도 높일 수 없으며 도대체 제국주의가 멸망하기 전에는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건설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주한미군과 전술 핵우산으로 나라의 국방력을 사실상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성장에 모든 힘을 집중한 남측과 달리, 자주노선을 천명한 북은 전쟁 이래 지속된 미국의 군사위협에 대비해 국방력 강화와 군 현대화를 자주적으로 달성해야 했다.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에 따른 국방력 강화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먼저, 모든 사업에서 정치사상사업을 앞세우는 주체의 사업방법에 따라 인민군대 전반을 일당백의 혁명무력으로 강화하는 정치사상교양사업과 계급교양사업이 강조되었다. 이를 통해 군인들에게 주체사상과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반수정주의, 반제국주의, 상하일치와 군민(軍民)일치의 원칙과 군사규율을 확립시켜 정치사상적으로 무장된 인민군대를 형성하고자 했다. 또한 군사훈련과 무장력 강화에도 힘써 인민군대의 정예화와 현대화를 꾀하였다.

둘째로 ‘4대 군사노선’(전민 무장화, 전군 간부화, 전군 현대화, 전국 요새화)을 확립하여 나라의 국방력을 크게 강화하려 했다. 전민 무장화 방침에 따라 준군사조직인 로농적위대(勞農赤衛隊, 현 로농적위군)붉은청년근위대교도대(敎徒隊) 등이 창설 및 강화되어 사회주의 건설을 다그치는 한편 전쟁에 언제나 대비하여 적을 소멸할 대비태세를 갖추게하였다.

또한 전군 현대화 방침에 따라 1963319군수공업의 자립적 토대를 더욱 강화하여 무기 및 전투기술기재의 생산과 수리사업을 확대발전시킬 데 대하여’, ‘군수공업의 원료기지를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란 내각 결정문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국방력 강화에 필요한 군수공업을 확충해 생산기지와 원료기지를 강화하는 한편, 군수공장을 후방(량강도~자강도 일대 산악지역)에 배치하고, 자립적 민족경제 원칙에 따라 무기의 국산화와 자립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전국 요새화의 방침에 따라 북 전역에 방위시설(방공호, 대공포대, 해안포대, 지하갱도 및 군수공장)을 구축하고 전시 대비 예비물자를 비축하였다. 그리고 경제체제를 전시체제로 전환하는 데 대비하여 전시에도 생산을 원활히 하기 위한 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이런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에 따라 북의 국방력은 확충되었으며 미국을 위시한 적대세력의 공격에 대비할 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는 나라의 자주권과 자립적 민족경제를 지키는 힘으로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다음에 기술할 1960~70년대 북미대결에서 북이 미국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승리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경제-국방건설 병진노선의 원칙은 계승되어 최근의 경제-핵무력건설 병진노선으로 출현하였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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