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몰락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전지구적 제국의 고립과 반제 자주 노선의 부상!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시녀, 하수인, 주구 윤석열 정권을 끌어내려야 한다.

희생은 따르겠지만 전망은 밝다!

무엇보다 민중에게는 동지가 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저자: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1960년대 초 촬영된 USS 매독스 구축함. [사진출처:나무위키]
1960년대 초 촬영된 USS 매독스 구축함. [사진출처:나무위키]

1964년 8월 2일. 오늘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 개입을 위해 무력 충돌을 조작한 통킹만 사건 59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60년대는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해 고통을 겪어 왔던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모든 대륙이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 투쟁 그리고 신생 독립국가 건설로 희망이 넘쳐 난 시대였다.

인도네시아 수카르노는 유고 티토, 이집트 나세르, 인도 네루와 함께 비동맹을 조직했으며, 가나 은크루마는 아프리카의 통일을 꿈꾸었다.

중국 마오쩌둥과 쿠바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조선의 김일성은 혁명을 성공시켰고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으며, 수카르노는 인민올림픽인 신흥국경기대회(가네포)를 개최했다. 

그러나 또한 시대를 역행하는 반동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 전쟁이다.

▶ 통킹만 조작 사건 ‘펜타곤 페이퍼’

지난 6월 16일 타계한 대니얼 엘즈버그는 미군이 베트남전 개입 명분을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했다.

‘펜타곤 페이퍼’는 7,000쪽 분량의 문서로 베트남전 관련 정책 결정·수행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사실을 은폐하고 의회와 국민들을 오도해 전쟁에 개입하고 확대해 온 과정을 담았다.

특히 미국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는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이 미군에 의해 날조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 미군 구축함 매덕스호가 통킹만 일대에서 북베트남군 어뢰정으로부터 공격받은 데 이어 이틀 뒤인 4일 공해상에서 2차 공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자 미국 의회는 8월 7일 통킹만 결의를 통해 존슨 대통령에게 군사행동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미 공군의 북베트남 폭격이 본격화되었고, 이듬해 3월 최초로 미 해병대 3,500명이 다낭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지상전이 이 ‘통킹만 사건’을 시작으로 급격히 확대되었다.

엘즈버그는 국방부 소속 군사분석 전문가로 ‘펜타곤 페이퍼’ 작성에 참여했다. 그리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조작된 전쟁의 문서를 공개했고, <뉴욕타임스>는 1971년 ‘펜타곤 페이퍼’를 인용해 당시 2차 공격이 베트남전 본격 개입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언론의 대대적인 폭로 보도는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다.

미국 역사상 37만 명이나 되는 징집대상자가 소집장을 불태우거나, 차라리 형무소 행을 자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그 당시 베트남 전쟁 반대, 징집기피자였다.

미국과 유럽의 반전 운동은 베트남의 제2전선이 되었다.

▶ 언론은 통치자가 아니라, 통치를 받는 사람들을 위해야 한다.

언론의 폭로 보도에 대해 닉슨 행정부는 문서 내용의 추가 공개를 막기 위해 보도금지 명령을 내리고 <뉴욕타임스>를 간첩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제1조에 근거해 신문사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언론은 통치자(the governors)가 아니라, 통치를 받는 사람(국민, the governed)들을 위해야 한다”라며 판결 이유를 밝혔다.

또한, 언론을 제약하는 국가행위는 헌법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보도금지의 불가피성도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는 게 판결 취지였다. 

엘즈버그 또한 스파이 행위와 음모, 정부 재산 도용 등 혐의로 기소돼 1973년 로스앤젤레스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연방법원은 불법 도청이 있었고, 엘즈버그 담당 정신과 의사 사무실이 침입당했으며, 닉슨 대통령이 판사에게 연방수사국(FBI) 국장 자리를 제안하는 등 다방면으로 회유와 불법적인 압력을 행사했다며 사건을 기각했다.

엘즈버그는 미국 하버드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공부했다. 1954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1958년부터 랜드 연구소에서 핵전쟁 관련 게임이론 등을 연구했고, 1964년까지 로버트 맥나마라 당시 국방장관의 고문으로 일했다. 

1965년 민간 평화 프로그램 평가를 위해 베트남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현지의 냉담한 여론, 막대한 민간인 사망자 수, 죄수 고문, 파괴된 마을 등 베트남전의 현실을 목격했다. 

그리고 엘즈버그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베트남전 전망이 암울하며 미국의 철수와 북베트남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으나 무시당했다.

베트콩 소년병들 [사진출처: 나무위키]
베트콩 소년병들 [사진출처: 나무위키]

▶ 동양에 대한 서양의 전쟁, 베트남 민족해방전쟁

인도차이나는 호찌민이라는 민족주의자가 이끄는 혁명가들이 일본에 맞서 싸웠고, 일본인들이 철수한 1945년 말에 하노이에서 100만 명의 인파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1946년 10월에 베트남 북부 항구도시 하이퐁을 폭격함으로서, 베트남독립동맹운동과 프랑스 사이에 8년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은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군대 전체를 무장시키기에 충분한 소형화기와 기관총 30만 정 그리고 10억 달러를 제공했다. 모두 합해 미국은 프랑스의 전쟁 수행 비용의 80%를 부담했다.

그런데 베트남은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이겼다.

그러자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산복합체 나라가, 가난하고 농민이 대다수인 베트남을 침공했다. 

이것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전쟁이며, 남반구(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북반구(글로벌 노스)의 전쟁이자 무엇보다 혁명에 대한 미 제국주의와의 전쟁이었다.

또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대 미국 꼭두각시 남베트남과 미국 그리고 한국, 호주, 뉴질랜드 등 용병국과의 싸움이었다.

전쟁 난민 작가 출신 비엣 타인 응우옌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초음속 전투기, 네이팜탄, 백린탄, 항공모함, 전략폭격기, 제초제 그리고 섬광과 굉음 속에서 분당 6,0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소위 미니 기관총이 장착된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괴물 같은 거대 산업과 비대칭적 전쟁을 벌였다. (중략) 그들은 게릴라전이라는 비대칭적 방식으로 대응했다. (중략) 미국은 이 전쟁에서 5만 8,000명가량의 인명 손실을 입었고, 한국은 5,00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반면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공식적인 전쟁 동안 약 4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라고 비대칭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쟁에서 50만의 군대와 가장 최신예 무기와 군사 기술에도 불구하고 패했다.

미국의 반공주의자들, 군인, 정치가, 언론들은 “위대한 미국이 그따위 베트콩에 굴복했다.”, “협상 무용, 무력 해결”의 구호를 외쳐댔지만, 베트남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호찌민 [사진출처:나무위키]
호찌민 [사진출처:나무위키]

▶ 베트남 전쟁은 “혁명 도덕성”과 “제국주의 범죄”와의 전쟁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 정권은 아래로부터 혁명을 지키려는 광범위한 인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와 미국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남베트남 정권은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로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남베트남의 도시를 벗어난 지방에는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농촌 지역은 통치할 수 없었다.

특히 전장 밖에서 반전 여론과 반전 시위가 조직되고, 1967년 미국 민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서 킹이 “호 아저씨(호찌민)의 정부는 중국이 세운 정부가 아니라 베트남 바로 그곳에 사는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인민이 세운 정부이며, 농민들에게 이 새 정부는 그들에게 절박한 토지개혁을 한 정부입니다.”라며 베트남 전쟁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폭발적인 반전 운동이 힘을 얻게 된다.

또한, 1968년 잔혹한 ‘미라이 대학살 사건’이 폭로되자, ‘더러운 전쟁’이라는 여론이 더 확대되며 미국은 도덕성에 큰 타격을 받는다. 마치 자유와 정의를 위한 의로운 전쟁인 양 믿어온 대다수 미국인에게, 미군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은 큰 충격이었다.

특히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고도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임무 수행을 운운하는 미군의 태도는 세계 인권 문제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미국의 선전이 허구임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물리적 힘은 약하더라도 행위에 도덕성이 있을 때 인간은 찬사와 존경을 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혁명 도덕성”에서 베트남은 이겼다.

베트남 인민은 서구의 간섭 없는 진정한 독립과 통일을 열망했다.

미국 동맹국들의 지식인들과 민중도, 동정과 공감은 “미국”보다 “베트콩”, “호찌민”이었다.

[사진출처:Pexels]
[사진출처:Pexels]

▶ 이제, 미국과의 한판 대결을 준비하여야 한다

베트남공산당 총서기 레주언이 남베트남이 무너진 직후인 1975년 5월 15일 한 연설 ‘미래를 위한 전진’ 중 일부이다.

“오늘 우리 4,500만 인민은 1975년 봄 총공세와 봉기를 통해 거둔 큰 승리를 환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신식민지주의 지배를 완전히 물리치고 우리나라의 절반인 남부를 온전히 해방시켰으며 (중략) 베트남의 승리는 베트남에서 민족 독립과 사회주의의 승리일 뿐만아니라, 국제적인 중요성을 가진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이는 미 제국주의의 세계 전략을 뒤집어놓았습니다.” 

베트남 승리로부터 48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동풍이 서풍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대리전으로 북·중·러로부터 포위 고립되어 있고, 핑크 타이드로 라틴아메리카 지배력도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다.

미국의 몰락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전지구적 제국의 고립과 반제 자주 노선의 부상!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시녀, 하수인, 주구 윤석열 정권을 끌어내려야 한다.

희생은 따르겠지만 전망은 밝다!

무엇보다 민중에게는 동지가 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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