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말, 90년대 초 이 나라 학생운동에서 아주 잠깐 동안 미국에 대한 대중적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곧 소멸되다시피 되었다. 4.19, 서울의 봄, 광주항쟁, 1987년 직선제 시민항쟁, 88년 노동자 대투쟁, 박근혜 몰아낸 촛불항쟁...에서도 반미는 등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각각의 과정과 모양은 거창했고 자못 감동적이었으나 그 어느 것도 결국 이 세상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본질의 한 자락도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질이 그대로면 결국은 그대로다. 지금 세상이 그 결과다. 이 땅에서 미국의 존재는 핵심적, 본질적 모순이다.

저자: 이범주.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위원.

영화 ‘파묘(破墓)’를 보며 반일(反日), 반미(反美)를 생각한다. 

어제 영화 파묘를 보았다. 반일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최근 들어 이승만을 재평가하고 결과적으로 그를 상찬하는 영화 ‘건국전쟁’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그것의 흥행흐름을 방해하려고 좌파들이 일부러 이 시기에 방영한다고 비난하는 영화다. 단 며칠만에 300만 이상의 관객이 보았다고 한다. 이런 영화는 한 번 봐줘야 한다.   

[사진출처: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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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영화를 싫어한다. 어두운 극장에서 긴장 유발하는 음산한 음악과 효과음을 견디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무서움을 많이 탄다. 무서운 게 싫다.  

사실성을 선호한다. 무당이 수십 년 동안 땅에 묻혀 있는 정령을 불러낸다니...조선 땅 척추 한 가운데 강원도 산골에서 쇠꼬챙이로 되어 박힌 그 정령이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라니...무당에 의해 불려나온 그게 물리적 실체로 되어 현대인에게 실제로 위해를 가하다니...그리고는 마침내 사람에게 맞아 죽는 모양으로 최후를 마치다니...말이 되냐 말이냐 이게. 허구에 근거하는 게 예술이라지만 그 바탕은 현실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하고 싶은 말을 위해 꼭 그런 모양을 취해야 했었을까. 어이가 없었다.  

[사진출처: 6.15남측위 최은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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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을 생각한다. 국힘당 류 인사들의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친일에 비해 진보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반일. 국힘당 인사들 중에서 반일적 언사 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 없다. ‘죽창가’ 불렀던 조국이 그렇듯 민주당 인사들은 간간이 반일(反日) 행위를 한다. 하여 민주당이 국힘당에 비해 다소 진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양당 포함하여 이 땅 제도권 정치인들이 예외 없이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 절대로 ‘반미(反美)’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반감 갖는 이유는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죄를 짓고 그들로 인해 아직도 우리 민족 전체가 분단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그들이 우리에게 단 한 마디 진지하게 사과한 적 없고, 독도가 지들 땅이라 우기며, 언젠가는 다시 한반도에 진출하겠다는 군국주의적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일본으로 하여금 그리 뻔뻔스레 행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고무, 조장하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른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의 유일패권 국가로서 사회주의 진영의 확장을 막고 고립시키기 위해 유럽에서는 독일,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재건했다. 전후 일본에서 군국주의자 몇몇 사람을 전범 혐의로 처형했지만, 대부분의 핵심 군국주의자들은 맥아더 미군정의 비호 아래 온전히 살아남아 향후 경제, 정치에서 일본의 핵심 엘리트가 되었다(이는 독일에서도 일어난 일이다). 일본은 미국의 적극적 지원 아래 빠르게 군사적 재무장의 과정을 밟아왔고 그 연장선에서 한미일 동맹의 한 축으로 되어 언젠가는 다시 반도의 남쪽에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한편 이 나라에서도 해방(?) 후 발본색원 되었어야 할 친일파 인사들이 단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고 경제, 군사, 정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대한민국의 핵심 엘리트로 되었다. 그 또한 미국이 행한 바다. 

[사진출처: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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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금 이 나라에서의 일본 관련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궁극의 원인은 바로 미국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진실로 반일하려면 실제로는 반미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반일을 필요에 따라 잠시 말할 뿐 이 문제의 궁극의 원인으로 되는 미국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윤정권은 그런 일본에 더욱더 밀착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이 땅에서 운위되는 반일은 사실 이 나라 민중들 비판의 창끝이 미국으로 향하는 것을 막아내는 일종의 가림막, 방어막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에 대한 예속과 분단구조에서 꿀 빠는 일부 인사들이 때때로의 필요에 의해 위기모면용 혹은 본질 호도용으로 활용하는 가림막, 방어막.  

80년대 말, 90년대 초 이 나라 학생운동에서 아주 잠깐 동안 미국에 대한 대중적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곧 소멸되다시피 되었다. 4.19, 서울의 봄, 광주항쟁, 1987년 직선제 시민항쟁, 88년 노동자 대투쟁, 박근혜 몰아낸 촛불항쟁...에서도 반미는 등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각각의 과정과 모양은 거창했고 자못 감동적이었으나 그 어느 것도 결국 이 세상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본질의 한 자락도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질이 그대로면 결국은 그대로다. 지금 세상이 그 결과다. 이 땅에서 미국의 존재는 핵심적, 본질적 모순이다.

영화에서는 여우가 범(조선)의 허리를 잘랐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여우는 일제가 꼬챙이로 이 땅의 척추 정중간에 찔러넣은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의 정령이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누가 이 땅, 범(조선)의 허리를 잘라 분단을 만들었는가. 이 나라 척추 정중간에 꽃힌 쇠꼬챙이, 그 여우는 누구인가. 미국이다. 영화에서는 지관(地官)으로 나온 최민식이 물에 젖은 몽둥이로 일본 다이묘의 정령을 두드려 패 호랑이 우리 민족 허리 자른 불길한 존재를 쫓아냈지만 현실 한국에선 인민들의 힘으로 이 땅을 타고 앉은 미국을 쫓아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뒤에 숨어있다. 심지어 적 일본을 전쟁에서 이겼으니 이 땅을 해방시킨 은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왜 반미를 해야 하는가?” 

이 나라가 아직도 미국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예속되어 미국이 러시아, 중국과 거래하지 말라고 요구하면 이 나라 기간산업이 망가져도 그 말을 들어야 하고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보내라면 그 말 따라 강대국 러시아와 척지는 것 감수하며 보내야 한다. 이렇듯 미국에 주권을 양도한 바람에 우리는 이 나라를 이 나라 인민들을 위한 방향으로 운영할 수 없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반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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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파묘.....이런 류의 영화는 본질을 가려 결국은 기존 질서 유지에 기여한다. 이승만 상찬하는 ‘건국전쟁’은 나쁜 영화고 ‘파묘’ 류의 영화는 한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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