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오늘의 3·1독립운동 정신은, 한미동맹 해체와 미군 철수 그리고 한·미·일 전쟁동맹 반대 투쟁이다!

그리고 윤석열을 끌어내리는 것이 애국이다!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저자: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사진출처: 3.1만세운동, 서세옥(Suh Se-ok), 1986년, 한지에 수묵 채색. 776.6 x 127.2 inch. 뉴욕한국문화원]
[사진출처: 3.1만세운동, 서세옥(Suh Se-ok), 1986년, 한지에 수묵 채색. 776.6 x 127.2 inch. 뉴욕한국문화원]

105년 전 3·1독립운동은 애국 항쟁이었다. 

3·1독립운동은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에 맞서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을 되찾자는 전 민족적 반일 애국 투쟁이었다. 일제의 총검에 희생된 사람만도 최소 칠천 명이며 구속자 역시 오만 명에 육박했던 민족자주독립 애국 항쟁이었다. 

3·1독립운동은 조선 민족의 자주정신을 내외에 힘 있게 과시한 민족적 장거였으며 비록 실패하였지만, 일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주는 등 식민지 나라들에 민족해방투쟁의 희망이 되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기미독립선언서는 일본을 향해, 우리의 독립이 양국 모두 잘 사는 길이며, 이해와 공감을 토대로 ‘새 세상’을 열어가자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일 양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새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유, 인권, 법치의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라고 3·1독립운동을 부정하고 일본을 파트너라고 주장했다. 

친일 매국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발언이다.

일본의 40년간 조선 점령과 35년간 식민 지배에서 항일무장투쟁 해온 선열 열사들과 민중이 피를 토할 노릇이다.

일본의 우리 민족에 대한 착취와 수탈 그리고 만행을 모르는 민중은 미래가 없다. 

운요호 사건 [그림출처: 위키백과]
운요호 사건 [그림출처: 위키백과]

▶ 일본의 침략, 운요호(雲揚號) 사건과 군사적 강점 서막, 강화도 조약 

1868년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를 과감하게 추진하면서, 중앙 권력의 강화를 위해 무사들의 불만을 국외로 돌리고, 무력을 동원해 조선을 정벌하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다. 일본의 정한론은 일본 내 모순해결과 국력 팽창의 방략으로서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론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대원군은 척왜(斥倭) 정책으로 맞섰다. 

1875년 일본은 군함 운요호로 강화도 초지진에 보내 발포를 유도하고, 이를 핑계로 영종도를 습격하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 그리고 방화 등의 공격을 하면서 조선과 통상 교섭을 강요했다. 결국, 이듬해 1876년 2월 조일 수호조약(朝日修好條規,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이 미국에 당한 포함외교(砲艦外交)를 재연한 것으로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약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언뜻 대등한 관계를 보여주는 조항 같지만, 사실은 청국의 속국이 아닌 자주국으로 설정해야 향후 청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 교묘한 일본의 계산이 숨어 있었다. 즉 일본은 청국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또한, 조약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는 치외법권을 인정해준 대표적 불평등 조약이다. 

당시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통상·조약 등에 무지했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무역규칙이 조인되었는데, ‘몇 년간 수출입 상품에 면세권을 부여한다’라는 무관세 조항도 들어갔다.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은 1880년대 들어 서양 여러 나라와도 불평등 외교통상 관계를 맺으며, 무방비 상태로 열강의 침탈을 받게 된다. 특히 일본과 열강들의 경제 침략으로 조선 경제는 제국주의 식민지 하부 구조로 들어간다. 

임오군란 [그림출처: 나무위키]
임오군란 [그림출처: 나무위키]

▶ 군인들의 폭동, 임오군란(壬午軍亂)과 제물포 조약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몰락해 가는 지주와 관료들을 매수해 조선 경제를 착취 수탈했다. 또한, 외래상품의 난입으로 농민과 수공업자 그리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고, 분노와 인내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히 민중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반외세 투쟁과 봉건 세력과의 투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외세 반봉건 투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북에서 바라본 우리 근대사』(민플러스, 2022)에 따르면 “1880년 1월 서울 부근 여러 고을에서 민중 폭동이 발발했으며, 1880년 12월 항해도 장련 농민들의 폭동, 1881년 10월 의주 지방 인민들의 반일 투쟁, 유랑 농민들의 무장단 활동” 등이 대표적 투쟁 사례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투쟁은, 정부의 신식 군대와의 차별대우와 무거운 군역에 시달려 온 구식 군인들을 고무시켰다. 특히 민비와 민씨 척족(戚族)이 정권을 잡은 후, 사대 외세 의존적인 정책을 펼쳐 나라의 국방력은 매우 취약해졌다. 또한, 군사제도의 문란으로 군역제도의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해 재정은 고갈됐다. 민중에게 수탈한 군포는 많으나, 관료들이 중간에서 가로채 군인들을 격분케 했다. 

결국, 1882년 6월 5일 군인들은 임오군란을 일으킨다.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처음으로 민중까지 호응하며, 마침내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일본 공관과 일본인들을 닥치는 대로 습격했다. 도성 안은 억눌려온 울분이 터져 걷잡을 수 없었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를 수습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군란은 수습되었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모든 것을 자신이 섭정하던 때로 되돌리려 했으나, 개항이 가져온 변화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 정세를 지켜보던 청나라와 일본은 파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조선에 먼저 들어온 청은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고, 조선에 군대를 주둔하면서 내정에 간섭했다. 닭 쫓던 개꼴이 된 일본은 조선에서의 청의 주도권을 용인하고, 1882년 8월 임오군란의 사과와 배상을 받기 위해 불평등한 조일 강화조약(제물포 조약)을 맺는다. 조선은 이때부터 자주 국가로서의 위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 무장 정변, 갑신정변(甲申政變)과 삼일 천하 그리고 실패 원인

1884년 8월 일본은 베트남의 식민지화를 노리는 프랑스와 종주국임을 자임하는 청과의 청프전쟁이 시작되자, 이 틈을 타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개화파를 지원한다.

1884년(甲申年) 12월 4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일본 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무장 정변,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정변의 주역들은 내각을 개편하고 군사, 경찰, 사법, 사회문화, 재정 등 중요한 직책을 차지했다. 또한,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분야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며,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지향하는 정강 14조를 공표한다.

“1. 청에 잡혀 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중략) 5. 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중략)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출처 : 나무위키)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난다. 

실패의 첫째 원인은 지금 윤석열 정부의 반민족 반민중 친재벌 수구 기득권 유지와 마찬가지로, 민비와 수구파들이 개화파의 개혁에 대해 극렬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현재 윤석열의 친일 종미 굴종 예속(隸屬)관계와 마찬가지로, 청나라가 미국으로 단지 바뀌었을 뿐이지, 청과 일본은 조선의 독립과 자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작금 윤석열이 미국의 핵과 전략자산에 의존하는 것처럼, 민비와 수구파들이 개화파의 정변에 대해 청나라에 의존하며 무력 진압을 요구한 것이다. 네 번째는 전민항쟁이 아닌 관료 중심의 개혁일 뿐이었다.

4·19혁명과 6월항쟁 그리고 촛불 항쟁처럼 갑신정변은 실패했으나.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역사적 사변이었다. 비록 개화파의 무장 정변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이후 민중의 반외세 반봉건 투쟁의 갑오농민전쟁으로 계승 발전되는 계기가 된다.

동학농민혁명[사진출처: 나무위키]
동학농민혁명[사진출처: 나무위키]

▶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그리고 아관파천(俄館播遷) 

갑신정변은 조선반도 주변 나라인 청, 일본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 또한, 조선의 국내 정치에 밀접히 결합할 수 있고 그들의 개입으로 국제 정치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변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마치 오늘날의 한반도정세를 보는 것과 같다.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한 이후 호의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러시아는 남하를 위해 겨울이면 얼어버리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대체할 부동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영국은 이 의도를 간파하고, 러시아의 조선 접근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영국은 조선에 해밀턴(거문도)을 차지하겠다고 일방적 통보를 하고 거문도를 점령한다. 중국 이홍장(李鴻章)이 러시아와 영국을 조정하여, 영국군의 거문도 철수는 2년 뒤에 이뤄진다.

개항 후 청나라와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피폐해진 조선 농민들은, 1894년 외세침략과 봉건제도에 반대하며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든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에 출병을 요청하였으며,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내세워 즉각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다. 일본은 동학농민전쟁이 진정되었음에도 철군을 거부하며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다.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 내각을 구성해 갑오개혁을 단행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1895년 4월 일본과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체결하고 반식민지로 전락한다. 일본은 이 조약으로 조선을 청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한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일본 낭인들을 경복궁에 난입시켜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불태우는 패륜적 만행을 저지른다. 이로 인해 반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시해사건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한다.

동학농민전쟁으로 표출된 민중의 혁명 의지는 일본의 무력에 의해 압살(壓殺)되었고, 이후 조선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으면서 식민지의 길로 들어선다.

▶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그리고 의병 투쟁

1900년 청나라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만주 일대를 점령한 러시아는 조선반도를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일본은 1902년 1월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다. 1903년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용인하는 대가로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인정할 것을 러시아에 요구하나, 거절당하자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러일전쟁에 영국과 미국이 전쟁 비용의 약 3분의 2를 빌려주고, 적극적 지원으로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이후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통해 일본은 40년간 조선을 무단 점령한다.

그러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 열기는 고조되었다. 장지연은 11월 20일 ‘황성신문’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일제의 침략성과 조약에 조인한 매국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했다.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도 조약의 무효와 각 지방의 조약 반대운동을 알리는 글을 싣고 반일 여론을 확산시켜나갔다. 그리고 을사오적의 처단과 조약 파기를 주청하는 가운데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은 자결로써 국권 침탈의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은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강제 병합되어 야만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조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 투쟁’이 전개된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의병 전사자 수가 1만 7,779명(『조선폭도토벌지』 기준)에 달하는 등 조선인의 저항은 격렬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서문당, 2019)에서 의병장들의 인물상을 소개하는데, 그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이 홍범도다. 

“홍범도는 평안도 양덕 사람인데, 이사하여 함경도 갑산에 우거하면서 사냥꾼 노릇을 하였다. 그는 체격이 헌칠하고 의지와 기개가 헌거로웠으며, 비록 글은 배우지 못하였으나 천성적인 의협심이 있어, 남 도우는 일에 앞장섰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1907년 겨울에, 차도광·송상봉·허근 등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북청의 후치령 전투에서 일본 장교 미야베의 중대를 섬멸시켰으며, 잇따라 황수원·삼수 등지에서도 대소의 교전이 있었다. (중략) 1919년에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이 있게 되니, 홍범도는 그 동지와 함께 다시 의병의 기치를 들고 나와 봉오동(평북 만포진 근처)의 대첩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 지배하면서 조선인을 열등한 존재로 깔보고 멸시했다. 

그러나 의병투쟁은 일본을 공포케 했다. 

▶ 오늘의 3·1독립운동은 한미동맹 해체 그리고 미군 철수 투쟁이다.

윤석열은 작년 3·1절에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다. (중략) 특히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라고 미국과 일본과의 공조를 강조했다. 

대통령이란 자가 이러니, 광화문 일대는 토요일마다 태극기 부대가 미국기를 흔들고 야단법석이다. 이자들은 자주는 내팽개쳐 버리고 미국을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도대체 나라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해방 이후 일장기 대신 미군기가 대신 올라가고 미군이 6·25전쟁 이후 무려 74년 동안 주둔하고 있다. 지금 민중은 거대한 감옥, 미국의 신식민지에 살고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 전 조선의 위정자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사대 매국 굴욕 외교로 망국(亡國)의 길로 치닫고 있었지만, 민중은 반제·반외세 투쟁으로 저항했다. 민중은 또한 조선 왕조 지배 세력의 억압·착취·수탈에 굴복하지 않고,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105년 전 조선인은 일본이 시키는 대로 복종을 감수하는 노예 민족이 아니며, 어떠한 폭압 정치에도 굴하지 않고, 자주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싸운 것이 3·1독립운동이다. 선열들이 목숨으로 지켜낸 금수강산을, 부끄럽지 않게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민중에게는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오늘의 3·1독립운동 정신은, 한미동맹 해체와 미군 철수 그리고 한·미·일 전쟁동맹 반대 투쟁이다!

그리고 윤석열을 끌어내리는 것이 애국이다!

반제·자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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