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 시기 유격근거지의 인민혁명정부가 해방 후 북의 인민정권을 탄생시킨 맹아였고 원형이었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유격구역 인민혁명정부 수립의 경험은 주체사상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이론의 형성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저자: 정대일. 철학박사(주체사상 연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사회선교사(평화통일분야).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실장.

[세기와더불어 독후기(48)] 7장 인민의 세상 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

왕청5구 가야허 인민혁명정부 수립 경축 대회 
왕청5구 가야허 인민혁명정부 수립 경축 대회 

이 절은 제목인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에 잘 드러나 있듯이, 유격구의 정권형태를 쏘베트 건설 노선에서 인민혁명정부 수립 노선으로 전환하는 방향전환을 다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은 유격구의 정권형태에 대해 기존의 쏘베트 건설 노선을 반대하고 인민혁명정부 수립 노선을 제안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인민혁명정부 수립 노선과 그 시책은 훗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으로 이어졌으며, 해방 후 수립된 북 인민정권의 맹아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32년부터 간도지방에 유격근거지가 창설되면서 정권건설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해방지구 형태의 유격구를 유지하고 그것을 운영해나가자면 그 영역내의 인민들에 대한 경제조직자적, 문화교양자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정권을 건설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국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유격구에 정권을 세우지 않으면 인민들을 먹여살릴 수도 없었고 그들을 투쟁에로 조직동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동만지방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은 1932년 가을부터 유격구역들에서 정권수립을 위한 역사적인 노정에 들어섰다. 그해 10월 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왕청현 가야허에서는 군중대회를 열고 쏘베트정부 수립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연길현 왕우구와 삼도만에서도 쏘베트가 수립되었다. 당시는 쏘베트열풍이 온 동만땅을 휩쓸던 때였다. 쏘베트를 수립하는 것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세계 각국의 혁명투사들과 진보적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공인된 사조로 유행되고 전파되었다.

국제당 본부에 가있던 조선의 최성우 등이 국제당 집행위원회에서 동방부의 일을 맡아보던 간부들(꾸우씨넨, 마지야르, 오까노)과 함께 작성하였던 조선공산당 행동강령은 조선의 완전독립과 함께 노동자, 농민의 쏘베트국가 수립을 당면과업으로 제기하였다. 쏘베트 노선을 지지하고 그를 혁명실천에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의문의 여지조차 가질 수 없는 하나의 상식으로 되였으며 혁명적, 공산주의적 입장과 기회주의적 입장을 가르는 일종의 기준으로 되고 있었다.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 나라의 공산당들과 공산주의 조직들에서도 쏘베트정권 건설을 지상의 과제로 내세웠다. 실로 쏘베트는 전 세계 무산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이상으로 되어 있었다.

쏘베트가 간도에서 일종의 환상이라고 할 정도로 강한 영향을 미친 이유는 쏘련에서 그 생활력과 진리성을 입증한 데도 있었다. 간도지방은 쏘련과의 접경지대였고 또 신생 쏘련의 영향을 이모저모로 많이 받고 있었다. 쏘련을 인류의 등대로 바라보고 있었던 간도의 인민들에게 있어, 쏘베트를 모든 정권형태들 가운데서 가장 우월하고 선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남북만 원정을 마치고 왕청에 돌아온 김일성은 쏘베트의 시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들이 유격구 도처에서 울려나오는 현실을 목격하고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불만들은 쏘베트정부의 좌경적 시책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쏘베트정부는 즉시적인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극좌적인 구호 밑에 사유재산 철폐를 선포하고 토지와 식량으로부터 낫, 호미와 같은 농쟁기에 이르기까지 개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동산, 부동산들을 공동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쏘베트정부는 재산의 공유화를 일사천리로 강행한 다음 유격구 안의 모든 주민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공동생활, 공동노동, 공동분배의 새로운 질서 밑에서 움직이도록 하였다. 갓 생겨난 간도지방의 유격구들에서 사회주의 질서를 즉시적으로 도입 시행한 것은 유치원생이 중간 과정도 거치지 않고 대학으로 직행한 셈이었다.

쏘베트정부는 또한 큰 지주, 작은 지주, 친일지주, 반일지주를 가리지 않고 유격구역 안에 있는 모든 지주들과 부농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였으며 마소와 양식까지도 일률적으로 수탈하였다. 이 조치로 인해 김일성이 표방했던 통일전선노선은 심대한 침해를 당하였다. 애국적인 지주들을 비롯한 많은 애국세력들이 반동계급으로 몰려 반일통일전선에서 이탈하게 되었고, 지주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던 조건에서 조중 인민들 간에 불신이 다시금 증폭되어 구국군과의 합작도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김일성은 동만특위의 서기였던 동장영을 만나 직접 담판을 시도했다. 김일성은 동장영에게 쏘베트정부의 시책이 좌경적임을 지적하고, 정권형태에 대해 재검토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동장영은 시책의 오류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쏘베트 건설은 국제당 중앙의 노선이기에 불가침이라면서 쏘베트를 절대화하였다.

그후 김일성은 다시 동장영과 함께 정권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도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쏘베트정부 시책의 후과가 초래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 동장영은 정권형태를 바꾸고 인민들의 구미에 맞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쏘베트를 대신할 만한 정권형태를 확정짓지 못하였음에 대한 난감함만 토로하였다.

김일성은 동장영을 만난 후, 간도지방의 실정에 맞는 정권형태를 자체의 힘으로 만들어 낼 결심을 하였으며, 리용국, 김명균, 조창덕을 비롯한 몇몇 군정간부들과 함께 쏘베트를 대신하는 혁명정권을 세울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며칠동안 심각한 토의를 하였다. 그는 토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정권형태의 규정에서 그 기준을 무엇으로 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 기준에 대하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우리 모두가 인민을 위한 투사들이고 인민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충복들인 것만큼 우리가 수립하게 될 정권이 각계각층 인민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으며 인민의 지지환영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데 기본을 두고, 현 단계에서 우리 혁명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이 설명을 듣고 나서,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각계각층 인민이라는 범주 속에는 노동자와 빈고농만이 아닌 광범한 근로대중이 포괄되겠는데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부는 통일전선적 정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통일전선적 정권이야말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의 성격에 부합되는 정권으로 될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김일성은 통일전선적 정부를 세우되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적 인민혁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다시금 역점을 찍어 말하였다. 이것이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이 제시한 정권건설 노선인 인민혁명정부 노선이다.

김일성이 조선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만지방에 적합한 정권형태로 인민혁명정부를 선택한 것은 그것이 반제반봉건민주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조선혁명의 성격에도 알맞고, 인민의 요구에도 부합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권형태의 기준을 인민의 요구에서 찾고 인민의 이익을 얼마나 옹호고수하며 철저히 대변하는가 하는데서 찾았던 것이다. 회의참가자들은 정권형태를 인민혁명정부로 결정한 다음, 어느 한 단위에서 먼저 시범을 창조해보고 그것이 좋다고 인정되면 다른 혁명조직들에도 일반화하자는데 합의를 보았다. 시범단위로는 왕청 5구 가야허로 결정되었다.

1933318일 인민혁명정부 제5(가야허)위원회 대표를 선출하는 모임이 사수평으로부터 10리쯤 떨어진 하모다니촌에서 진행되었다. 이 모임에서 김일성은 쏘베트정부를 대신하게 될 정부로 인민혁명정부를 세우려고 한다는 것과, 이 정부는 세계정권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로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날의 모임에서는 10개 조항에 달하는 정부 정강내용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그 정강내용은 훗날 조국광복회 10대강령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해 여름 국제당 파견원의 참석하에 유격구역 정권형태에 관한 노선전환을 토의하는 회의가 개최되었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적 정부로서의 인민혁명정부 노선을 내놓고 정부의 시정방침에 관한 안을 다시금 천명하였다. 그 안에는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경제, 교육, 문화, 보건,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정부가 수행해야 할 제반 민주주의적 시책들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 안은 국제당의 새로운 노선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국제당 파견원 또한 인민혁명정부 노선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여러 날 동안 진행된 회의에서 김일성이 제시한 인민혁명정부 노선에 기초하여 쏘베트를 인민혁명정부로 개편하고 유격구의 모든 지역들에서 쏘베트 노선의 좌경적 후과를 청산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 회의가 있은 후 동만지방의 모든 쏘베트들은 인민혁명정부로 개편되었다. 조건이 성숙되지 못한 곳에서는 과도적 형태로 농민위원회를 내오고 점차 인민혁명정부로 개편하도록 하였다. 가야허에서의 인민혁명정부 수립과 노선전환 회의를 계기로 하여 동만 각 현의 혁명조직구들에는 구 인민혁명정부가 나오고 마을마다에는 촌 인민혁명정부가 출현하였다. 구 인민혁명정부들에는 회장, 부회장, 9~11명의 집행위원을 두었으며 토지부, 군사부, 경제부, 식량부, 통신부, 의료부 등의 부서들을 두었다.

항일무장투쟁 시기 유격근거지의 인민혁명정부가 해방 후 북의 인민정권을 탄생시킨 맹아였고 원형이었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유격구역 인민혁명정부 수립의 경험은 주체사상의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 이론의 형성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저작권자 © 통일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