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싸우는 심리학』 서평

에리히 프롬의 전작을 읽을 시간도 없고, 엄두도 나지 않는다면, 꼼꼼하고 성실한 저자 김태형의 『싸우는 심리학』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프롬의 엑기스가 담긴 그 책을 읽고서, 나와 같은 자본주의형 인간들이 휴머니스트들에게 조금이라도 설득되기를,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살아갈 마음이 싹트기를 바란다.

저자: 정윤주(의정부 왕이빨). 의정부 사는 이빨이 큰 사람입니다. 어설프고 못났는데 귀여운 것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통일시대연구원 새내기 회원입니다.

텃밭에서 에리히 프롬 다시 읽기

-김태형의 싸우는 심리학서평

 

요즘 텃밭을 일구는, 직장 내 소모임을 하고 있다. 근무지 옆 자투리땅에서 뜻 맞는 직원들끼리 모여 일주일에 한 번씩 조그맣게 농사를 짓는다. 건물 벽을 따라 좁고 길쭉하게 자리 잡은 노지에는 이미 수십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데, 그럼에도 매주 새로운 모종 심을 빈자리가 생겨나고, 잡초 뽑고 물 줄 때면 제법 품이 드는 것이, 흙에 발 디디고 있을 때만큼은 작았던 땅이 다섯 배쯤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 켠에는 호박, 오이, 수세미, , 여주 등 덩굴식물만 따로 심어 놓았는데, 감고 올라가도록 작물들 위로 빨랫줄을 엮어 늘어뜨려 주었다. 문제는 빨랫줄의 높이가 너무 높다는 데 있었다. 심어놓은 덩굴식물들 중에는 호박이 가장 키가 크지만, 아직 허공의 줄을 잡을 만큼은 아니다.

빨랫줄은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데, 느리게 자라는 호박의 덩굴손이 과연 빨랫줄을 붙들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 바람과의 대결은 어른과 어린아이가 하는 쌀보리 게임처럼 호박에게 아주 불리해보였다.

몇 번 텃밭농사를 지어본 직원들은, 호박이 알아서 줄을 타고 올라갈 거라고 했다. 호박은 원래 덩굴을 뻗어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으니, 생긴 대로 자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쉽지도 순리적이지도 않아서, 당연한 일은 본질적으로는 당연하지가 않다.

느리디 느린 덩굴손이 바람의 속도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하나도 뻔하지 않고 심지어 기적, 혹은 혁명처럼도 보인다. 느린 것과 빠른 것이 어느 순간 같은 속도가 된다는, 그 모순을 돌파했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적인 것이다.

일주일 뒤에 찾은 텃밭의 호박은 빨랫줄을 단단히 감고 있었다. 대체 덩굴손은 몇 번의 헛손질을 하고서야 빨랫줄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얼마나 긴 기다림 끝에 결정적인 찰나를 만났을까? 만약 호박 넝쿨이 바람과 중력에 순종했다면 결코 줄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람과 중력에 역행해야만 붙잡을 수 있었을 터다. 대세를 거스르는 일은 몹시도 힘들지만, 생명의 근본적인 성질은 굴종하기 보다는 맞서고 뻗어나가며 자기 존재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살아있음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살아있는인간이라면, 호박처럼 생명의 본질을 충실히 따라야 할 것이다. 사회심리학의 창시자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 본성에 따라 자유롭고 능동적으로 성장하여 사회적 존재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 현대인들은 생명력을 왕성하게 발산하지 못하고 좀비처럼 살다가 허무한 최후를 맞는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가 병 들었기 때문이고, 병든 사회는 인간의 감정과 인격을 왜곡시킨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이미 죽었지만, 동물적 존재로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기 위해 현대인은 자본주의적 인격을 획득하고 부여받는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전 생애에 걸쳐 거듭 주장해온 내용이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프롬이 주장한 자본주의적 인간형의 사회적 성격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네 가지 유형으로 정의 내렸다. 권위주의적 성격, 대세 추종적 성격, 쾌락 지향적 성격, 시장 지향적 성격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격은 고립감과 무력감, 권태감과 무가치감이라는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큰 방해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회를 건강하게 바꿀 수 있을까? 또한 인간은 어떻게 혁명적 존재로 재탄생 할 수 있을까? 프롬은 그 답을 사랑에서 찾는다. 프롬의 사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프롬의 이론을 계승, 발전시킨 심리학자 김태형 또한 한 목소리로 사랑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능력은 오직 사회관계 속에서만 회복할 수 있으며 혁명적 인본주의의 핵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다고 말이다.

김태형은 프롬의 말을 인용하며, 사랑 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최고의 위치에 놓인인간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도달하기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신에게만 매몰되어 타자의 문제에 공감하고 아파할 줄 모르는, 뼛속까지 자본주의적 인간인 나에게는 특히나 어려운 주문이다.

그러나 이 못 말리는휴머니스트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믿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라고, 해낼 수 있다고 종용한다. 인간에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전적으로 믿어야한다고. 바람에 흔들리더라도 혼자보다는 같이 흔들리는 삶을 살라며, 백 번을 놓치더라도 천 번을 붙잡으라고 말이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그 확신에 찬 말들에 조금은 설득이 된 것 같다. 내 손가락에 소맷부리 잡혀줄 수 있는 품이 넉넉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의 손을 붙잡고 조금 더 살아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까지 내 바람은, 독거노인이 되기 전까지 안락사가 허용되는 나라로 떠나기에 충분한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사람을 믿어도 실망하지 않을 거라는 그 말이 희망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면 빛을 향해 뻗어나가는 초여름의 싱싱한 호박 넝쿨을 보고도 마냥 서글펐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전작을 읽을 시간도 없고, 엄두도 나지 않는다면, 꼼꼼하고 성실한 저자 김태형의 싸우는 심리학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프롬의 엑기스가 담긴 그 책을 읽고서, 나와 같은 자본주의형 인간들이 휴머니스트들에게 조금이라도 설득되기를,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살아갈 마음이 싹트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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